“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 즉 딴 맘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걸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여기에 너의 수의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다음 세상에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님의 편지 전문입니다.
우리가 아는 발렌타인데이, 2월 14일이 바로 우리나라의 영웅 안중근 의사가 사형 선고를 받은 날인데,
이날을 일본인과 일부 초콜릿 (chocolate) 제조 회사들이 의도적으로 초콜릿을 주고 받는 날로 만든 것입니다. 다시 한번 기억하세요. 그리고 아이들에게 전해주세요. 31세 젊은 나이로 형장에서 이슬로 사라져버린 대한민국의 영웅이 사형선고를 받은 날이며, 참 믿기 힘든 역사적 치욕입니다.
"일본인으로서 이런 말을 하게 된 것은 가슴 아픈 일이지만, 안중근은 내가 만난 사람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이었다." -안중근을 조사했던 일본 검사-
"혁명가가 되려거든 손문처럼 되고, 대장부가 되려거든 안중근처럼 되라" -중국 속담-
"안중근은 조선의 안중근, 아시아의 안중근이 아니라, 세계의 안중근이다" - 중국의 석학 '장타이옌' -
내가 죽거든 내 시체는 아직 조국으로 옮기지 말고, 조국이 자유독립을 쟁취하게 되면 그때 조국으로 옮겨서 매장하여 다오.
모든 재산을 아들에게 미리 상속해주고 아들과 며느리와 함께 행복하게 살고자 했던 한 할머니가 실제로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과 며느리가 할 말이 있다며 말하기를 "어머니, 저는, 어머니랑 마음이 안 맞아서 같이 못 살겠어요. 이제 집을 나가주세요. 나가서 혼자 사세요. "이런 짐승만도 못한 녀석들!!~
어머니는 그날 너무나 큰 상처를 받고 아들과 며느리에게 버림받고 돈도 없이 집을 쫓겨나야만 했습니다.
당장 먹고 살 곳도 없고 돈도 없고 정처 없이 그저 한 목숨 부지하기 위해 부자 동네를 찾아가서 집마다 벨을 누르고 파출부로 써달라고 할머니는 간절히 부탁을 하면서 돌아다녀야만 했습니다.
할머니는 심신이 모두 지친 가운데 계속 퇴짜를 맞다가 어느 한 집에서 할머니를 보고 집 주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할머니, 저희 집에 아버님이 병환으로 누워계시는데 혹시 외람되지만 가능하시다면 병 간호 좀 해주시고 그냥 말벗도 좀 되어 주시겠어요?" 아들과 며느리에게 쫓겨나 거처와 돈이 없었던 할머니는 "네! 그럼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할머니는 그날부터 그 집에 들어가 사랑과 정성을 다해 그 집 환자 할아버지를 돌보고 친구처럼 말벗이 되어주었습니다.
어느덧 1년이 지날 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서로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되었읍니다. 어느날, 집 주인 젊은 부부는 할머니에게 말했습니다. "할머니, 저. 어려운 부탁이 있는데요. 저희 어머니가 되어주세요. 아버님도 할머니를 너무 좋아하시고 저희 부부도 우리 어머니께서 너무 일찍 돌아가셔 어머니가 안 계셔서 어머니로 꼭 모시고 싶읍니다. 괜찮으시면 저의 어머니로 모시는 것 허락 해 주세요." 그렇게 할머니는 뜻밖의 간청을 받고 착하고 마음씨 좋은 아들, 며느리. 또래의 남편과 약식으로 결혼하고 그 집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새남편과 아들 부부와 함께 승용차를 타고 외식을 위해 나가는데 정말 우연히 식당에서 그 할머니의 독자였던 아들과 며느리를 만났습니다
아들이 오랜만에 어머니를 뵈니 놀랍게도 훤해진 어머니. 예전의 어머니의 모습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매우 럭셔리하면서도 우아한 옷과 장신구를 한 어머니. 누가 봐도 한눈에 재벌 집 마나님 같은 모습이 었습니다.
아들은 "아니, 이게 어찌된 일이냐"고 묻고는 당시 사업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그 아들은 돈 좀 있어 보이는 어머니에게 "어머니! 다시 우리 집에 들어오셔서 사세요 저희가 잘 모실게요! " 라고 말하니 할머니 왈 : " 누구신지요? 나는 당신과 같은 아들과 며느리를 둔 적이 없습니다. 내 아들과 며느리는 저기 있고 내 남편도 있습니다.
인간의 삶에는 인과응보라는 것이 있읍니다. 하나님은 악인을 벌하시고 선인에게는 만배로 갚아 주십니다.
70년대초 아카시아꽃이 산과 들에 흐드러지게 핀 어느해 5월 하순이었다. 경기도 성남에 사는 한 가정주부로부터 청와대 육영수 여사님 앞으로 한통의 편지가 날아왔다 그 편지의 사연은 이러했다.
그녀의 남편이 서울역 앞에서 행상을 해서 다섯 식구의 입에 겨우 풀칠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데 얼마전 남편이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에 누워 있기 때문에 온 가족이 굶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녀 자신과 어린 자식들이 끼니를 잇지 못하는 것은 그나마 견딜수 있지만 80세가 넘은 시어머니가 아무것도 모른 채 마냥 굶고 있으니 도와 달라는 애절한 사연이었다.
그때만 해도 육영수 여사는 이런 편지를 하루에도 수십 통씩 받았었고 이미 널리 알려진대로 가난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을 알게 모르게 많이 도와 주셨다.
그 편지를 받은 바로 그날 저녁 나는 영부인의 지시로 쌀 한가마와 얼마간의 돈을 들고 그 집을 찾아 나섰다. 성남은 지금은 모든 게 몰라보게 달라진 신도시가 되었지만 그때는 철거민들이 정착해 가는 초기 단계였기 때문에 도로는 물론 번짓수도 정리가 안 되어서 집 찾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물어물어 그집을 찾아갔을 때는 마침 온 가족이 둘러앉아 저녁상을 받아놓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청와대에서 찾아왔노라고 말하고 어두컴컴한 그 집 방안으로 들어갔다. 거의 쓰러지다 만 조그만 초막 같은집에는 전기도 없이 희미한 촛불 하나가 조그만 방을 겨우 밝히고 있었다.
방 아랫목에는 머리가 하얗게 센 노파가 누가 찾아 왔는지도 모른 채 열심히 밥만 먹고 있었다. 밥상 위에는 그릇에 수북한 흰 쌀밥 한 그릇과 멀건 국 한 그릇, 그리고 간장 한 종지가 놓여 있었다. 그것을 본 순간 나는 갑자기 매우 불쾌한 생각이 들었다. 쌀이 없어 끼니를 굶고 있다고 하더니 돈이 생겼으면 감자나 잡곡을 사서 식량을 늘려 먹을 생각은 않고 흰 쌀밥이 웬 말인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한참 앉아 있으려니까 희미한 방안의 물체가 하나 둘 내 눈에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그때 내가 받았던 충격과 아팠던 마음을 세월이 흐르고 흘러도 잊을 수가 없다. 그 노파가 열심히 먹고 있던 흰 쌀밥은 쌀밥이 아니라 산자락에서 따 온 흰 아카시아꽃이었다. 그 순간 가슴이 꽉 막혀오고 표현할 수 없는 설움 같은 것이 목이 아프게 밀고 올라왔다.
나에게도 저런 할머니가 계셨는데, 아무 말도 더 못하고 나는 그 집을 나왔다. 그 며칠 후 나는 박 대통령 내외분과 저녁식사를 같이 하게 되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그 이야기를 말씀 드렸다. 영부인의 눈가에 눈물이 보였다. 박 대통령께서도 처연한 표정에 아무런 말씀이 없이 천정을 쳐다보시면서 애꿎은 담배만 피우셨다.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당시에는 미쳐 생각을 못했는데 세월이 흐른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나라에서 가난만은 반드시, 이런 매서운 결심을 하시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절절하게 가슴을 친다.
60년대초 서독에 가 있던 우리나라 광부들과 간호사들을 현지에서 만난 박 대통령. 가난한 나라의 대통령과 가난한 나라에서 돈벌기 위해 이국만리 타국에 와 있는 광부와 간호사. 서로가 아무런 말도 못하고 그냥 붙들고 울기만 했던 그때, 박 대통령은 귀국하면서 야멸차리 만큼 무서운 결심을 하시지 않았을까. ‘가난만은 반드시 내 손으로’ 이런 결심을.
백의의 천사 나이팅게일이 영국 왕실로부터 받은 훈장증서에는 이런 뜻의 글귀가 적혀 있다고 한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은 물질로 도와라. 물질이 없으면 몸으로 도와라.물질과 몸으로도 도울 수 없으면 눈물로 돕고 위로하라.” 광부들과 간호원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는 가난뱅이 나라 대통령이 그들을 눈물아닌 그 무엇으로 위로하고 격려할수 있었을까?
나는 매년 아카시아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5월이 되면 어린 시절 동무들과 함께 뛰어 놀다 배가 고프면 간식 삼아서 아카시아꽃을 따먹던 쓸쓸한 추억과 함께 70년대초 성남에서 만났던 그 할머니의 모습이 꽃이 질때까지 내 눈앞에 겹쳐서 아른거리곤 한다.
그 중 한 명의 아들이 유독 병약하고 총명하지도 못하여 형제들 속에서조차 주눅 들어 있는 아들이 아버지는 늘 가슴 아팠다고 합니다.
어느 하루, 아버지는 다섯 그루의 나무를 사 왔습니다. 그리고 다섯 명의 자식들에게 한 그루씩 나누어 주며 1년이라는 기한을 주었지요.
가장 잘 키운 나무의 주인에게는 뭐든 원하는 대로 해 주겠다는 약속과 함께 말입니다.
약속한 1년이 지났습니다. 아버지는 자식들을 데리고 나무가 자라고 있는 숲으로 갔습니다.
놀랍게도 유독 한 그루의 나무가 다른 나무들에 비하여 키도 크고 잎도 무성하게 잘 자라고 있었습니다.
바로 아버지의 가슴을 가장 아프게 하였던 그 아들의 나무였던 게지요.
약속대로 아버지는 아들에게 원하는 것을 물었고, 예상대로 이 아들은 자기가 딱히 무엇을 요구하여야 할지 조차도 말하지도 못하였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이 아들을 향해 큰 소리로 칭찬하기를 이렇게 나무를 잘 키운 것을 보니, 분명 훌륭한 식물학자가 될 것이며, 그리 될 수 있도록 온갖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가족 모두들 앞에서 공표하였지요.
아버지와 형제들로부터 명분있는 지지와 성원을 한 몸에 받은 이 아들은, 성취감이 고조되어 식물학자가 되겠다는 꿈에 부풀어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하얗게 밤을 지낸 새벽, 잘 자라준 나무가 고맙고 하도 신통하여 숲으로 갔습니다.
어스름한 안개 속에 움직이는 물체가 그의 나무 주변에서 느껴졌고 곧이어 물조리개를 들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아들의 두 눈에 보였습니다.
그 후 이 아들은 비록 훌륭한 식물학자는 되지 못하였으나, 미국 국민들의 가장 많은 지지와 신뢰를 받은 훌륭한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바로 그분이 세계에 이름을 떨친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이라고 합니다.
미국 최초의 4선 대통령으로서, 오늘날 미국 행정부의 기능과 역할은 그의 통치방식에 힘입은 바 크며, 국내적으로는 1930년대 미국의 대공황 타개를 위하여 뉴딜정책을 추진했고, 대외적으로는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연합국을 지도함으로써, 이후 미국이 세계평화에 기여하는 토대를 마련 하였습니다.
두번째 이야기
아버지, 어머니, 딸 이렇게 세 식구가 모처럼의 가족여행 중에 교통사고가 났습니다.
자동차가 언덕 아래로 구르는 큰 사고였습니다. 어머니만 상처가 가벼울 뿐 아버지와 딸은 모두 크게 다쳐서 병원에 입원해야 했습니다.
특히 딸은 상처가 깊어서 오랫동안 병원치료를 받았음에도 평생 목발을 짚고 다녀야했습니다.
당시 사춘기였던 딸은 무엇보다도 마음의 상처가 깊었습니다.
친구들이 학교에서 체육을 할 때에도 딸은 조용히 그늘에서 그들을 구경만 했습니다.
그나마 같은 목발 신세인 아버지가 딸에게는 큰 위안이 되었습니다.
아버지도 지난 교통사고 이후 목발을 짚어야 하셨던 것입니다.
딸이 투정을 부려도 그 처지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아버지가 나서서 말없이 받아주었습니다.
딸에게는 아버지와 같이 공원 벤치에 나란히 목발을 기대놓고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유일한 행복이었습니다.
딸은 힘들고 어려웠던 사춘기를 잘 넘기고 대학을 입학하였고 그 입학식에 아버지도 참석해 주셨습니다.
그 해 어느 날이었습니다. 세 식구가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마침 그 앞에서 작은 꼬마 녀석이 공놀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공이 큰 길로 굴러가자, 꼬마는 공을 주우려고 좌우도 살피지 않고 자동차가 오고 있는 큰 길로 뛰어 들었습니다.
이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아버지가 목발을 내던지고 큰 길로 뛰어들어 꼬마를 안고 길 건너쪽으로 달려가는 것이었습니다.
순간 딸은 자기 눈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잠시 후 어머니가 딸을 꼬옥 안아주며 딸에게 이렇게 속삭였습니다.
"애야, 이제야 말 할 때가 된 것 같구나. 사실은 너의 아버지는 다리가 전혀 아프지 않으시단다. 퇴원 후에 다 나았거든, 그런데 네가 목발을 짚어야 된다는 사실을 알고 나신 후 아버지도 목발을 짚겠다고 자청하셨단다.
너와 아픔을 같이 해야 된다고 하시면서 말이다. 이것은 아빠 회사 직원들은 물론 우리 친척들도 아무도 모르는 사실이란다. 오직 나와 아버지만이 아는 비밀이야."
딸은 길 건너에서 손을 흔드시며 어린아이처럼 해맑게 웃으시는 아버지를 보면서 오랜시간 자신을 위해 말없이 가슴 속에 품었던 아버지의 사랑에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 사람 관계는 이기고 지는 것이 없습니다.
잔인하게도 인간은 백번 잘해줘도 한 번의 실수를 기억한다.
사람의 마음은 간사해서 수많은 좋았던 기억보다 단 한 번의 서운함에 오해하고 실망하며 틀어지는 경우가 참 많아요.
서운함보다 함께한 좋은 기억을 먼저 떠올릴 줄 아는 현명한 사람이 되어야 행복합니다.
내가 먼저 고맙다고 인사하고, 내가 먼저 미안하다고 말한다면 사람관계는 나빠지려고 해야 나빠질 수 없습니다.
사람 관계에서는 이기고 지는 것이 없습니다.
먼저 고맙다고, 먼저 미안하다고 말하세요.
참, 이런 거 아세요.
식사 후, 적극적으로 밥값을 계산하는 이는 돈이 많아서 그런것이 아니라, 돈보다 사람과의 관계를 더 소중히 생각하기 때문이고,
일할 때, 주도적으로 하는 이는 바보스러워서 그런 게 아니라 책임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고,
다툰 후, 먼저 사과하는 이는 잘못해서 그러는 게 아니라, 당신을 아끼기 때문입니다.
늘, 나를 도와주려는 이는 빚진 게 있어서 그런게 아니라, 진정한 친구로 생각하기 때문이며,
늘, 안부를 물어주는 이는 한가하고 할 일이 없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 마음속에 늘 당신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잊지 마세요. 한 번 맺은 소중한 인연을 아끼고 서로 사랑하는 것이 우리가 함께 살아야할 진정으로 행복한 삶이란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