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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정의 세월★

"불쌍한 딸을 위해서도 오래 살아야지, 
내가 세상을 뜨면 혼자서 어떻게 살겠나."
101세의 박옥랑(朴玉郞)할머니

자손들의 극진한 봉양을 받아도 모자랄 나이에
몸이 불편한 68세 된 딸을 돌보느라 손에 물이 마를 날이 없다.
딸 조의순(趙義淳)씨가 전신마비 상태로 누워 있기 때문이다.
이들 모녀는 현재 광주시내 13평짜리 영구 임대아파트에서 
서로 거울삼아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朴씨에게 불행이 찾아든 것은 1939년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朴씨가 출근한 사이
가정부가 업고 있던 네살배기 딸이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머리와 목을 심하게 다쳤다. 
朴씨는 고개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딸을 들쳐 업고
용하다는 병원, 한의원, 침술원 등을 찾아 다녔지만 허사였다.
그 뒤로부터 딸은 방에 누워서 천정을 보며 살아왔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남편마저 집을 나가버렸다.
朴씨는 딸을 언니집에 맡기고 학교에 계속 나갔다.
별다른 생계수단이 없었기 때문이다.
1953년 전남 나주시 영산포 여중에서 30년의 교사생활을 마감했다.

"딸의 상태가 악화된데다 생업이라는 핑계로
아픈 딸을 혼자 방에 방치했다는 생각이 퍼뜩 든 거죠."
교직을 그만 둔 뒤 朴씨는 딸에게 글 공부를 시켰다.
종이에 글을 써 보이며 한글은 물론이고 한자까지 가르쳤다.
학교 교과서와 문학서 등도 읽어줬다.
딸은 금방 글을 깨우쳐 갔다. 때로는 시도 읊조렸다.
몸을 움직이지 못할 뿐 머리는 영리했다고 朴씨는 기억한다.
딸의 손발 노릇을 하느라 늙을 틈도,
아플 여유조차 없었던 朴씨도
얼마 전부터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고 한다.
기억력도 크게 떨어졌다.

朴씨는 "딸은 나한테 몸을 기대고,
나는 점차 흩어지고 있는 정신을 딸에게
맡기고 사는 셈이죠"라며 웃스면서도 슬품이 가득하다
그녀는 자신이 저 세상으로 간 뒤
딸이 어떻게 살지를 생각하면 아득하다고 했다.

어미로서 이렇게 생각해서는 안 되겠지만
내가 세상을 등질 때 딸애도 함께 갔으면 하는 바램이지요.
국민 기초생활보장 수급자인 朴씨는
정부에서 매달 나오는 얼마 되지 않는 돈도 아끼고 아껴
한 달에 몇 만원씩 이라도 꼭 저축을 한다.
자신이 죽은 뒤 딸 혼자 살려면 
더 많은 돈이 필요할 거라는 생각에서다.

趙씨는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분이 나의 어머니"라며
"오늘까지 산 하루 하루가 모두 어머니의 덕"이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朴씨가 사는 아파트에 간병 봉사를 하러 다니는
유상엽(44.여)씨는"할머니는 딸을 돌봐야 한다는
정신력 때문에 건강하게 사시는 것 같다," 며
"이들 모녀를 볼 때마다,모정(母情)은 위대하고
지고(至高)하다는 걸 실감하게 된다." 고 말했다.

이토록 끈질긴 모정의 실타래가 얼키고 설킨
기나긴 100년의 삶의 언덕을 기대는 어머니,
곱디고운 중등 여선생님,청춘을 불살라 여기까지 온 긴세월.. 
반세기를 딸 위해 보낸 세월 전신마비의 
딸을 위해 간호하다 늙지 못했다는 어머니..
어머니의 청춘은 그 누가 보상하리요.

네살배기 딸아이 장애가 되어 이제 68세 되었고
어머니의 연세 101세,아픔의 강물, 한 맺힌 세월의 바다
눈물로 얼룩진 모녀사랑 자식 위해 늙지 못하고

자식 때문에 차마 저 하늘로 떠나지 못하고 
눈 감지 못함이여. 당신의 삶이여, 아픔이여..
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 모정의 영혼..
이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것은 어머니의 사랑..
길러주신 부모님은 우리들의 은인이십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참으로 위대하십니다.

부모님한테 살아계실적 정성을
다하여 효도 하십시요.
세상을 떠난후 후회하면서 
반성 해본들 소용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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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규의 골목 이야기

내가 아무것도 해준 것 없는 사람

내 나이 7살 때...

술 먹고
주사만 부리는 아버지와의 불화로
집을 나간 엄마를 다시 본 건
20년이 훨씬 지난 여름이었다

공장
가까운 곳에 얻어 놓은 자취방에
이틀이 멀다시피 와서
빨래와 반찬들을 만들어 놓고 가는 엄마와 마주치기 싫어

동료와 어울려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며 방황하다
해를 만날 수 없는 달처럼
집으로 오곤 했다

밤하늘에 별들이
바다에 몽땅 빠져버린 날들만 새다

다시 시작된 인연 앞에
잃어버린 시간을
보상해주려는 몸짓들이

내가 버리고 떠나온 것처럼
위선 같아 보였던 나는
인정할 수도 있는 것들 조차
밤보다 더 깊이 외면하고 있었다

“오지 마세요 제발“

돌아가는 엄마의 뒷모습에
던져버린 탓이었는지

낮과 밤처럼
오가던 엄마의 흔적들이
내 앞에서 사라져버렸고
단 하나의 언어로만 남은 날들이
꼬박 한 달이 다 되어가던
어느 날 밤

누군가 다급히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열고 나간 내 눈에
낯선 중년의 남자가 서 있었다

“혹 김귀녀씨 아들이세요?..“

“누구시죠?”

그 남자는
자신이 가지고 온 소식을 꺼내놓기가
뭐 했는지 좀처럼 입을 열지 못하다

“ 어머니가 자네 집에서 나오다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에 입원했다네 중태일세“

기억상실증으로
아무것도 기억 못 한 채 살다
하나하나 세월을 따라
떠올라온 지난날들과 함께
           다시 찾아간 집에는

세상 밖으로
떠나간 아버지의 흔적과

세상 속으로
사라져 버린 아들의 소식만을 듣고서
수년간을  찾아 헤매다녔다는
낯선 남자의 이야기를
귓등으로 넘기며 도착한 병실엔

흰 천으로 싸여
영안실로 밀려가는 엄마의 손끝에서
잎을 위해지는 꽃잎처럼 떨어진
사진 하나

유치원 운동회 날
엄마와 찍은 사진에 손때 묻은
흔적들이 번져있는 걸 보며

그제서야 잊고 있었던....
아니

이를 악물고 눈썹 끝에서
버티고 있던 눈물이 쏟아지고 있었다

        바람을 용서하며 떨어지는
                 저 꽃잎이 되어..

하늘나라로 떠나간 엄마가 남기신
트럭에 실려있는 커다란 물통 하나와 세탁기 두 대가

이별 후에도
끝나지 않는 슬픔을 안고 지내던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네 어머니는 식당일을 하며..“

쉬는 주말엔
혼자 사시는 홀몸노인 분들이 있는
동네들을 찾아다니며

이불과 옷가지들을 빨아주는
봉사를 하고 다니셨다는 말을 들으며
나는 생각했다

           그 일을 내가 하겠다고.....

따뜻한 어둠에 잠긴 별이 되어
멀어져간 엄마가
내게 주고 간 트럭 한대로

마음이 갈 수 있는 곳들을 찾아
쉬는 주말마다
5년째 돌아다니고 있던 나와
뜻을 함께해주는 지금의 아내를 만나

파란 하늘가에
어르신들의 이불과 옷가지들을
펼쳐놓으며

밤을 사랑한 달이 되어
엄마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가고 있었다

“자네가..
김 여사 아들이구먼“

“자네 어머니 덕분에
우리 노인들은 행복했다오“

“다음 생에
김 여사를 한 번 더 만나고 싶어?”

“다음 생에도 또 신세 지게?”

“이생에서 김 여사 모자에게
신세를 많이 진 것 같아서
다음 생엔 좀 갚아주려고 그려
왜 꼽냐?“


    빨래를 넌 자리 밑에
      고슬고슬 밥을 지어
오순도순 식사를 하고 계시는
            어르신들은

섬을 재우는 파도처럼
말동무가 되어주던 엄마의 모습이
그립다는 이야기를 찬으로
함께 드시고 계신 걸 보며

"내가 아무것도 해준 것 없는 사람..."

​엄마가 들어 있는 하늘을 보며
소리치고 있었다


         사랑한단 말을
               이제서야 한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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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가난한 젊은 夫婦의 슬픈 사랑 이야기 - 은방울 姉妹의 "마포종점"

1960년대 마포는 강가에 갈대숲이 우거지고 飛行場이 있는 여의도로 나룻배가 건너다니며, 새우젓을 파는 등 시골 냄새가 물씬 풍기는 곳이었다. 가난한 庶民들이 많이 살았던 이곳은 청량리를 오고 가는 電車의 終點이 있었으나, 1968년 없어졌다. 겨울밤이나 비가 내리는 저녁이면 늦게 電車를 타고 오는 남편과 자식 등 家族들을 마중나온 女人들이 종점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는 모습들을 흔히 볼 수 있었다.
  
<마포종점>을 작사할 當時 작사가 정두수는 연속으로 히트곡을 發表하며 왕성한 活動을 하고 있던 박춘석 작곡가와 밤을 새워가며 作品을 쓰고 있었다. 그들은 밤샘 작업 후 마포종점 인근에 있는 映畵 녹음실의 성우, 배우, 스태프 등이 새벽마다 모여드는 有名한 설렁탕집에서 食事를 하곤 했다. 어느 날 그 집에서 食事를 하는데 설렁탕집 主人으로부터 어느 가난한 젊은 戀人의 悲劇的 얘기를 들었다.
  
어떤 젊은 夫婦가 방세가 싼 마포종점 부근의 허름한 집에 사글세로 살고 있었다. 大學 講師로 在職하고 있는 남편과 살고 있는 女人은 가난한 살림에도 악착같이 남편을 뒷바라지 하였다. 겨울이면 따뜻한 아랫목 이불에 밥을 묻어두고 남편을 기다리던 그녀는 남편이 일찍 귀가하면 마포종점에서 손을 잡고 인근 당인리로 이어지는 긴 둑길을 걸으며 얘기를 나누면서 사랑을 키워갔다.
  
그러다가 더 큰 도약을 위해 남편은 美國 留學을 갔는데 너무 過勞하여 뇌졸중으로 쓰러져 졸지에 死亡하였다고 한다. 그런 悲劇的 소식을 접한 女人은 밀려오는 충격을 견딜 수 없어 마침내 실성을 하게 되었다. 정신착란 상태인 그녀는 이미 돌아간 남편을 하염없이 기다리며 궂은 비 내리는 마포종점을 배회했는데 결국 종적을 감추어서 이제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다고 한다.
  
1966년 여름에 이런 悲劇的 사랑 얘기를 설렁탕집 主人으로부터 듣고 作詞家 정두수 先生은 밤잠을 설치면서 가난 속에서도 서로 사랑하며 誠實하게 살았으나 不幸한 결말에 이른 젊은 부부의 서러운 삶을 그리는 작사를 하였고, 박춘석 作曲家는 이런 悲劇的 要素가 담긴 가요시의 뜻을 살린 애절한 곡을 만들어 깨끗하고 독특한 和音을 구사하는 은방울 자매의 입사 기념으로 1968년 지구레코드에서 發賣하였는데, 크게 히트하였다.
  
現在 마포 어린이 公園에는 이 노래를 記念하여 <마포종점> 노래비가 서 있다.

<마포종점>

  밤 깊은 마포 終點 갈 곳 없는 밤 電車
  비에 젖어 너도 섰고 갈 곳 없는 나도 섰다
  
  강 건너 영등포에 불빛만 아련한데
  돌아오지 않는 사람 기다린들 무엇하나
  첫 사랑 떠나간 終點 마포는 서글퍼라
  
  저 멀리 당인리에 발전소도 잠든 밤
  하나 둘씩 불을 끄고 깊어가는 마포 終點
  
  여의도 飛行場엔 불빛만 쓸쓸한데
  돌아오지 않는 사람 생각한들 무엇하나
  궂은 비 내리는 終點 마포는  서글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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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일상다반사 2021. 5. 23.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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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글ᆢ]


아버지는
초등학교 교사셨다.
평생 교감이나 교장자리도 마다하고
아이들 앞에서 교편을 잡으셨다.

하루 종일 재잘대는
아이들과 함께 하는 것이
아버지에게는
더 없는 행복이었다.

정년퇴임을 하신 후,
아버지는 학생들이 그리운지
저녁이면 앨범을 펼쳐 들고

30년 전
처음 만났던 학생들 얘기부터
그리운 옛 이야기를 들려 주시곤 했다.

“이 아이는
정말 말썽꾸러기였지…
하루라도 안 싸울 날이 없었단다.

그래도 심성은 착하고 붙임성도 좋아서
나만 보면 떡볶이 사달라며 날마다 조르곤 했지….”

“유진이는
참 의젓하고 밝은 아이였다.
아프신 홀어머니와 힘들게 살면서도
늘 웃음을 잃지 않았지.

아프신 어머니 때문에
늘 의사가 되겠다고 말하곤 했었단다.

내가 가끔
집에 찾아가서 유진이 몰래
고기며 쌀이며 사다 놓곤 했었는데…”

줄줄이 이어지는 추억담은
늘 우리 자식들 마음을
촉촉이 적시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산책을 다녀오시던
아버지가 쓰러졌다.
폐암 말기…

“한 평생 칠판에다
쓰고 닦고 하시더니
폐암이 되셨구나.”

희망이 없다는
의사들의 말을 뒤고 하고
우리는 아버지를 집으로 모셔와
할 수 있는 치료를 계속했다.

종종 아버지 제자들이
소식을 듣고 찾아오곤 했다.
그럼 아버진 또 한참을
옛 추억에 잠겨 이야기를 나눴다.

그때 만큼은
아버지 얼굴에도 생기가 돌았다.

그러나 아버지 병세는
날이 갈수록 나빠졌다.
기침 때문에 잠을 못 이루시는
날들이 잦아지고, 가래 끓는 소리도 거칠어졌다.
마침내 대화를 나주지 못할 정도로
병세가 나빠졌다.

그때 마침,
진료 받던 병원에서
의사 한 명을 보내주었다.

20대 후반의 여의사였는데,
가래가 끌면 젖은 가재로
손가락을 넣어 가래를
꺼내주곤 하면서
가족 만큼이나 지극정성으로
보살펴 주었다.

여의사가
오는 날이면 아버지도
유난히 표정이 밝아졌다.

한번은 아버지가
기침이 무척이나 심해져
얼굴은 핏발로 벌게지고
목은 가래가 들끓어
숨쉬기조차 답답해 하시자,
손으로 가래를 꺼내던 의사는
난데없이 음료수 빨대를
가져오라고 했다.

대체 빨대로 무엇을
하려나하고 의아해하며
가져다주자

그녀는 빨대 한 끝을
아버지 목구멍에 넣고
한 끝은 자기가 물고
가래를 입으로 빨아내는
것이 아닌가?

자식들도
감히 못하는 일을
젊은 여의사가 하고 있었다.

폐암 환자였기 때문에
가래에서 악취가 심했다.
그러나 여의사는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그렇게
빨아내기를 몇 십분 정도 하자,
가래 끓는 소리가 잠잠해지고
아버지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몇 달 후,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장례를 치르고,
나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기 위해 병원을 찾았다.

그런데,

“네??... 의사 보내드린 적 없는데요?”

“분명히 병원에서 왔다고 했는데요?”

“의사 분 성함이 어떻게 되나요?”

“… …”

“아무튼 저희 쪽에서는 의사를
보내드린 적이 없습니다.”

여의사의 이름도 몰랐던 나는
헛걸음만 한 채 아쉬운
발걸음을 돌려야했다.

얼마 후,
외국에서 한 통의 편지가
날아왔다.

돌아가신 아버지께 온 편지였다.

"선생님,
저 유진이에요.
선생님이 참 예뻐해 주시던
유진이…,

가끔 저희 집에
쌀이며 반찬이며 놓고
가셨던 거 저 다 알고
있었어요.

그때는 자존심이 상해서
차마 고맙다는 말씀도
드리지 못했지만…

그 못난 제자가
의사가 됐어요.

이 소식을 알면
제일 기뻐하실 선생님을
수소문해 찾았을 때,
많이 아프시다는 걸
알았어요.

침상에 누워 계신
선생님을 뵈었을 때

의사가운을 입은
저를 보며
비록 말은 못하셨지만
‘어서 오렴’하고 반겨 주시듯
제 손을 꼭 잡아주신 선생님…
저 알아보신 거 맞죠?

언젠가
제 꿈이 의사라고 하자,
선생님은

'유진이는
사람의 몸 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고쳐주는
훌륭한 의사가 될 거야' 하셨죠.

그 말씀 지키려고요…

이곳, 아프리카 오지에서
환자들의 몸 뿐만 아니라
마음도 치유해주는
의사가 되고 싶어요.

선생님도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실 거죠?

사랑합니다, 선생님."

나는
머나먼 아프리카에서
날아온 그 여의사의 편지를
아버지 묘소에 고이
놓아드렸다.

-고성군에서 가져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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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찡한 이야기 💦

소록도에서 거주하고 있는
K신부 앞에 일흔이 넘어보이는
노인이 다가와 섰습니다

"저를 이 섬에서 살게 해
주실 수 없습니까?

느닷없는 노인의 요청에
K신부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아니, 노인장께서는
정상인으로 보이는데
나환자들과 같이 살다니요?"

"제발..."

그저 해본 소리는 아닌 듯
사뭇진지한 표정으로 이야기하는 노인을
바라보며,

K신부는
무언가 모를 감정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 저에게는 모두 여덟 명의 자녀가 있었지요"

자리를 권하여 앉자
노인은 한숨을 쉬더니
입을 떼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중의 한 아이가
문둥병에 걸렸습니다."

"언제 이야기입니까?"

"지금으로부터 40년전,
그 아이가 열 한살 때였지요"
병 사실을 알았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행동은
그 아이를 다른 가족이나 동네로부터 격리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로 왔겠군요"
"그렇습니다."

"소록도에 나환자촌이 있다는 말만 듣고,
우리 부자가 길을 떠난 건
어느 늦여름이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교통이 매우 불편해서
서울을 떠나 소록도까지 오는 여정은 멀고도
힘든 길이었죠.

하루 이틀 사흘...
더운 여름날 먼지나는 신작로를
걷고 타고 가는 도중에
우린 함께 지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다
어느 산속 그늘 밑에서 쉬는 중이었는데,

나는 문득 잠에 골아 떨어진 그 아이를 죽이고 싶었습니다.
바위를 들었지요.
맘에 내키진 않았지만
잠든 아이를 향해 힘껏 던져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만
바윗돌이 빗나가고 만 거예요.
이를 악물고 다시 돌을 들었지만...,

차마 또다시
그런 짓을 할 수는 없었어요.
아이를 깨워 가던 길을
재촉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소록도에 다 왔을 때
일어났습니다

배를 타러 몰려든 사람들 중에
눈썹이 빠지거나 손가락이며 코가 달아난 문둥병 환자를
정면으로 보게 된 것입니다.

그들을 만나자
아직은 멀쩡한 내 아들을 소록도에 선뜻 맡길 수가 없었습니다.

멈칫거리다가
배를 놓치고 만 나는
마주 서있는 아들에게
내 심경을 이야기했지요.

고맙게도
아이가 이해를 하더군요.

'저런 모습으로
살아서 무엇하겠니?
몹쓸 운명이려니 생각하고
차라리 너하고 나하고
함께 죽는 길을 택하자 ...,'

우리는 나루터를 돌아
아무도 없는 바닷가로
갔습니다.

신발을 벗어두고
물 속으로 들어가는데
어찌나 눈물이 나오던지.

한발 두발 깊은 곳으로 들어가다가거의 내 가슴높이까지 물이 깊어졌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아들녀석이
소리를 지르지 않겠어요?

내게는 가슴높이였지만 아들에게는 턱밑까지 차올라
한걸음만 삐끗하면 물어보고 빠져 죽을 판인데
갑자기 돌아서더니 내 가슴을 떠밀며 악을 써대는 거예요.

"문둥이가 된 건 난데
왜 아버지까지 죽어야 해요!"

형이나 누나들이
아버지만 믿고 사는 판에
아버지가 죽으면 그들은 어떻게 살겠냐는
것이었습니다.

힘으로
자기 혼자 죽을테니
아버지는 어서 나가라
떠미는 아들녀석을 보는 순간,

나는 그만 그 애를 와락 껴안고 말았습니다.

참 죽는 것도
쉽지만은 않더군요.

그 후
소록도로 아들을 떠나보내고
서울로 돌아와 서로 잊은 채
정신없이 세월을 보냈습니다.

오남 이녀의
일곱 명의 아이들이 자라서,
결혼을 하고, 손자 손녀를 낳고 ...,

얼마 전에 큰 아들이
시골의 땅을 다 팔아서 올라와 함께 살자더군요.
그래서 그렇게 했지요.

처음, 아들네 집은 편했습니다.
주는 대로 받아먹으면 되고,
이불 펴 주면 누워 자면 그만이고 ...,

가끔씩 먼저 죽은 마누라가 생각이 났지만,
얼마 동안은 참 편했습니다.

그런데 날이,
시간이 지날수록
아이들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애들은
아무 말도 없는데 말입니다.

어느 날인가는 드디어
큰 아이가 입을 엽디다.
큰아들만 아들이냐고요..

그날로 말없이 짐을 꾸렸죠

그런데 사정은 그후로도 마찬가지였어요.

둘째, 셋째, 넷째 ...,

허탈한 심정으로
예전에 살던 시골집에 왔을 때

문득 40년 전에 헤어진 그 아이가 생각나는 겁니다.

열한 살에
문둥이가 되어
소록도라는 섬에다
내다버린 아이,

내 손으로
죽이려고까지 했으나,
끝내는 문둥이 마을에
내팽개치고,
40년을
잊고 살아왔던 아이,

다른 일곱 명의 아이들에게는
온갖 정성을 쏟아 힘겨운 공부까지 시켜 놓았지만 ...,

내다버리고 까마득하게
잊어 버렸던 아이 ...,

다시 또 먼길을 떠나
그 아이를 찾았을 때
그 아이는 이미 아이가 아니었습니다.

쉰이 넘은 데다
그동안 겪은 병고로 인해
나보다 더 늙어보이는 ...,

그러나 눈빛만은
예전과 다름없이 투명하고 맑은 내 아들이 울면서
반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나를 껴안으며 이렇게 말했지요.

"아버지를 한시도 잊은 날이 없습니다.
아버지를 다시 만나게 해달라고,

40년이나 기도해 왔는데 이제서야
기도가 응답되었군요."

나는 흐르는 눈물을
닦을 여유도 없이 물었죠.

"어째서 이 못난 애비를
그렇게 기다렸는가를 ...,

자식이
문둥병에 걸렸다고
무정하게 내다 버린 채,

한 번도 찾지 않은 애비를 원망하고
저주를 해도 모자랄 텐데,
무얼 그리 기다렸느냐고...,"

그러자 아들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 와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데
그 이후로 모든 것을
용서하게 되었노라고 ...,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비참한 운명까지 감사하게
만들었노라고 ...,

그러면서 그는
다시 한번 자기의 기도가 응답된 것에 감사하는
것이었습니다.

아 아 ... !
그때서야 나는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의 힘으로
온 정성을 쏟아 가꾼
일곱 개의 화초보다,

쓸모없다고
내다 버린 한 포기 나무가 더 싱싱하고푸르게 자라 있었다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누구신지는 모르지만
내 아들을 변화시킨 분이라면,

나 또한 마음을 다해
그 분을 받아들이겠노라고
난 다짐했습니다.

신부님 !,
이제 내 아들은 병이 완쾌되어
이곳에서 믿음으로 건강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애는 내가 여기와서 함께 살아주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그 애와 며느리,
그리고 그 애의 아이들을 보는 순간,

그 바람이
결코 거짓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들의 눈빛에는
지금껏 내가 구경도 못했던 그 무엇이 들어 있었습니다.

공들여 키운 일곱명의 아이들에게선
한번도 발견하지 못한
사랑의 눈빛이라고나
할까요 ...,

나는 그 애에게
잃어버린 40년의 세월을 보상해 주어야 합니다.

함께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그 애에게 도움이 된다면,
나는 기꺼이
그 요청을 받아들일
작정입니다.

그러니 신부님!
저를 여기에서 살게 해 주십시오!"


< 옮긴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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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찐한 감동 스토리

▶ 현관문 비밀번호가 같은 집의 행복

둘째 며느리 집에 갔다가 나는 가슴
따뜻한 며느리의 마음을 느꼈다.

아파트 현관문의 비밀번호가
우리집하고 같았기 때문이다.

내가 사는 아파트 뒷동에 사는 큰 아들네도 우리집하고 비밀번호를 똑같이 해놓았다.

엄마가 오더라도 언제라도 자유롭게
문을 열라는 뜻이었다.

지금은 워낙 비밀번호 외울게 많아
헤맬 수 있기 때문이리라.

그 이야기를 듣고 기분이 참 좋았는데,
작은 아들네도 같은 번호를 쓰는 지는 몰랐었다.

그런데... 그 사소한 것이 나를 그렇게
마음 든든하게 만들었을까?

언제 내가 가더라도 마음 놓고 문을
열 수 있게 해놓은 것.

그 마음이 어느 것보다도 기분을 좋게 했다.

우스개 말로 요즘 아파트 이름이
어려운 영어로 돼 있는 게 시어머니가 못찾아오게? 그랬다는 말이 있다.

설마 그러랴 만은
아주 헛말은 아닌 듯한 생각도 든다.

결혼한 아들네 집에 가는 일. 김치를
담가서도 그냥 경비실에 맡겨두고
오는 것이 현명한 시어머니라는 말은
누가 만든 말일까?

그런데 엄마가 오실때 그저 자연스럽게
엄마 사는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처럼
그렇게 오라고 만든 두 아들네 집
비밀번호. ㅡ

그것만 생각하면 가지 않아도
든든하고 편하다.

그 건 아들의 마음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두 며느리의
배려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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