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변호사
"아저씨 박스 없으니까 다음에 오세요"
에이지즘(Aigism)
고위직 법관을 지낸 선배가 있다.
법정에서 재판장인 그의 모습을 볼 때마다 고개가 저절로 숙여지는 카리스마가 흘러나오곤 했었다. 부드럽고 관대하지만 그 너머에는 총명과 지혜가 넘쳐흘렀었다.
소박한 그는 노년이 되어서도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옷을 입고 다녔다. 어느 날 그를 만났더니 웃으면서 이런 얘기를 했다.
“동네 과일가게 앞에 가서 과일을 내려다보고 있었어. 그랬더니 잠시 후에 가게 주인이 나보고
‘아저씨 박스 없으니까 다음에 오세요’
라고 하는 거야. 처음에는 그게 무슨 소린가 했지.
그러다가 생각해 보니까 내가 그 가게에서 버리는 박스를 얻으려고 온 불쌍한 노인으로 생각했던 거야.
허 참.”
늙으면 그렇게 초라하게 보일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선배는 원래 부잣집 아들로 상당한 재력가이기도 했다. 늙으면 누구나 초라하게 보여지고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 같기도 하다.
어제 점심시간이 조금 지나서였다. 점심 먹은 게 체했는지 속이 불편했다. 길가에 약국이 보였다. 유리문에는최고명문대학의 배지가 코팅이 되어 있었다. 나는 다른 약사와 달라요 일등품이에요. 하고 말하는 것 같기도 했다.
약국 안에는 가운을 입지 않은 약사로 보이는 사십대 초쯤의 남자가 혼자 앉아 있었다. 눈길이 부리부리한 게 불만이 가득찬 느낌이었다.
“활명수 한 병만 주세요.”
내가 공손하게 말했다. 늙을수록 젊은 사람들을 대할 때 조심하면서 예의를 차리자는 마음이었다. 인상을 찡그리고 퉁명스런 말을 내뱉는 늙은이는 내가 봐도 싫기 때문이다.
그 약사인 듯한 남자가 시큰둥한 표정으로 활명수 한 병을 꺼내 던지듯 앞에 내놓았다. 내가 천원짜리 지폐 한 장을 건네줄 때였다.
“이 안에서는
약 못 먹어요. 나가세요 .”
안내나 설명을 하는 게 아니라 내쫓듯 하는 태도같이 느껴졌다. 구걸하러 온 거지에게라도 그렇게 하면 안될 것 같았다. 나는 약국 유리문을 밀고 나와 거리에서 활명수를 마셨다.
당장 그 병을 버릴 데가 없었다. 다시 약국문을 들어가 그 남자에게 물었다.
“병은 약국안 쓰레기통에 버려도 됩니까?”
“버려요.”
그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속에서 슬며서 불쾌한 기운이 솟아 올랐다. 싸구려 약 한 병을 팔더라도 고객에게 그렇게 불친절하면 안될 것 같았다. ‘늙어가는 법’이라는 책을 쓴 한 여성 노인의 글이 떠올랐다. 늙어서는 젊은 사람이 불손하다고 화를 내거나 항의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당연히 굼띠고 둔하고 추해진 늙음을
받아들여야지 항의하는 것 자체가 그 자신이 모자라는 걸 증명하는 행동이라는 것이다.
젊은 사람이 불쾌한 태도를 취하거나 말을 하더라도 그건 그 사람의 모자라는 인격이기 때문에 구태여 말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나는 참고 약국문을 열고 나왔다. 그런데도 뭔가 궁금해서 그냥 그 자리를 떠날 수가 없었다. 나는 다시 약국의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 물었다.
“정말 죄송한데요 한 가지만 여쭤봐도 될까요?”
“뭔데요?”
“왜 약국에서 약을 샀는데 안에서 약을 먹는 게 안되고 길거리에서 먹어야 합니까?”
“약을 먹으려면 마스크를 내려야 하잖아요? 그러면 병균이 쏟아지잖아요.”
그에게 늙은 나는 세균 덩어리로 보이는 것 같았다. 왜 그랬는지 대충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의문이 있었다.
젊고 예쁜 여자가 오거나 비싼 약을 사가는 젊은 사람들한테도 그렇게 불친절하고 싫은 표정을 지었을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에이지즘(Aigism)이라는 말이 있다. 늙은 사람을 더럽고 둔하고 어리석게 느껴 혐오하는 현상이다. 카페나 음식점에 가서 보면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표정을 짓는 주위의 사람들을 볼 때가 있다.
나는 젊어 봤다. 그리고 세월의 강을 흘러 늙음의 산 언저리에 와 있다. 나는 노인을 혐오하는 일부 젊은이들의 단순하고 짧은 생각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아마도 그들의 젊음이 영원할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유교의 경로사상을 감히 바라지는 못하지만 에이지즘까지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들도 늙을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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