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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발 정성
노서방은 남이 놀 때 일하고 남들이 술 마실 때 냉수 한사발로 목을 축이고 남들이 쌀밥을 먹을 때 깡조밥을 먹으며 한푼 두푼 모았다.

노서방에게 시집온 길안댁도 부창부수라, 노서방보다 더 악착스러워 낮에는 농사일, 밤이면 삯바느질, 큰일 치르는 집에서는 일손을 거들어주며 품삯을 모았다. 농사를 끝낸 늦가을부터 노서방은 새우젓장수를 하고 길안댁은 방물장수를 했다. 어디서 논밭이 나오기만하면 두꺼비 파리 잡아먹듯 널름 낚아채는 것은 노서방이다. 그 바쁜 중에도 부부간에 금슬이 좋아 가을무 뽑듯이 3년 터울로 아들 셋을 쑥쑥 뽑아냈다.

노서방이 마흔이 되자 사람이 변했다. 기와집을 짓고 땟국이 흐르던 옷을 벗어던지고 황금빛 비단 마고자에 정자관을 쓰고 집에 하인들을 부렸다. 참봉 벼슬을 사서 사람들은 그를 노참봉이라 불렀다. 뒷짐을 지고 장죽을 물고 주막출입을 하며 동네사람들에게 술도 샀다. 어느 날 얼근히 술에 취해 안방에 들러 길안댁 치마끈을 풀었더니 허리는 절구통이요, 손은 나무뿌리요, 얼굴은 가뭄에 갈라진 논바닥인데 여덟팔자로 누워 귀찮다는 듯이 하품까지 해댄다.

노참봉은 마침내 저자거리에 첩살림을 차렸다. 포동포동한 걸 껴안는 재미도 재미려니와 노참봉을 위하는 일이 하도 지극정성이라 감탄이 절로 나온다. 첩은 노참봉 가슴속을 꿰뚫어보며 입속의 혀처럼 노참봉이 말하기도 전에 가려운 곳을 긁어준다. 베갯머리송사에 넘어간 노참봉이 첩의 오빠 장사밑천을 대주고 첩의 친정에 논밭 사주느라 그동안 땀 흘려 사놓은 문전옥답은 하나둘 떨어져 나갔지만 가끔씩 본집에 들르는 노참봉에게 길안댁은 바가지를 긁지 않는다.

노참봉이 몸이 쇠하여 한의원에 가서 산삼·녹용과 온갖 비싼 약재를 넣은 대보탕을 지어왔다. 약 먹는 중엔 정을 삼가라는 한의원의 신신당부에 본집에 머물렀다. 길안댁이 약탕관을 끼고 사는데도 약사발은 많았다 적었다 들쭉날쭉이다.

“정성이 없어 정성이!” 노참봉은 냅다 고함을 지르고 남은 약 다섯첩을 보자기에 싸들고 첩 집으로 갔다.

불과 닷새만인데 첩은 버선발로 나와 눈물을 글썽이며 노참봉 품에 안겼다. 한의원의 당부도 깔아뭉개고 첩의 치마를 올리고 고쟁이를 내렸다. 그 날부터 첩이 달여 오는 약사발은 저울에 단 듯이 항상 약사발 위에서 한치가 모자란 선에 대보탕이 고였다.

노참봉이 하루는 외출했다가 약 마실 때가 되어 첩 집으로 돌아와 약을 짜는 뒤뜰로 갔더니, 노참봉이 온 줄도 모르고 첩이 하수구에 약을 쏟고 있었다. 너무 많이 쏟았는지 다시 물을 붓는다.

악몽에서 깨어난 듯 정신이 퍼뜩 든 노참봉이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두번 다시 첩 집에 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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