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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상사(吉祥寺)

아~ 아름답다!
어찌 저리도 고울 수가 있을까?
첫눈에 반한 사내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인 옆으로 다가가
진담반 농담반으로 여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 당신에게 반했어요!
오늘부터 당신은 나의 영원한 마누라야!
죽기 전에는 우리의 사랑을 막을
길이 없을 거야. 알았지요?”

이렇게 첫눈에 반한 사랑은 시작되었고,
그 사랑은 영원불멸의
꽃이 되어 지금도 피어 있다.

기생 진향(眞香)은 가세가 기울어 방년 16세에 조선권번(기생학교)에 들어가
금하 하일규 스승 밑에서 궁중아악과 가무(歌舞)를 배웠다.

그녀는 타고난 재주가 있어
아악과 가무에 능통했지만,
특히 시예(詩藝)에 탁월한 재능이 있어 스승 하 일규는
더 큰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라고 하였다.

그 당시에는 일제시대라서 일본 유학을 다녀와야 알아주던 시대였다.
그러나 일본 유학을 떠난 지 1년도 안 되어서
하일규 스승이 함흥에서 투옥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진향은 무작정 귀국선에
몸을 싣고 함흥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일개 기생신분으로 감옥에 갇힌 스승을 만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스승을 만나기 위해
함흥기생이 되었는데,
이때 함흥영생여고 보 교사들의
회식장소에서 운명적인 만남
또 한 사람은 함흥영생여고 보
영어교사였는데 진향의 본명은 김영한(金英韓)이고,
함흥여고 교사의 이름은 백석(白石) 백기행이었다.

함흥에서 시작된 사랑은 진향이 먼저 서울로 오고,
뒤이어 백석이 서울로 와
지금의 종로구 청진동에 신방을 차렸다.
그때 백석의 나이 스물여섯
김 영한의 나이 스물둘이였다.

두 사람은 맑은 물 한그릇을 앞에 놓고 서로의 마음을 언약하며,
서로가 서로를 확인하는 뜻에서 맞절을 하고 초야(初夜) 첫날밤
을 맞이했다.
두 사람의 불 같은 사랑은 이렇게 시작되었는데,
초야를 치룬 후 방문을 걸어 잠근 채 꿈 같은 나날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날 시인 백석은 그녀가 사온
“당시선집(唐詩選集)”을 뒤적이다가 당나라
(詩人)시인 이백(李白)의 시
“자야오가(子夜吳歌)”를 발견하고,
“자야(子夜)”라는 아호를 진향에게 지어주었다.
“자야오가”는 중국 장안(長安)에서 서역(西域)으로 적군을 물리치러 나간 낭군을
기다리는 여인 "자야"의 애절한 심정을 노래한 시다.

그러나 기생과의 사랑은 순탄치 않았다. 백석의 부모는 기생과의 사랑을 막으려고
백석을 고향으로 불러내려
강제로 결혼을 시키기도 하였지만,

그때마다 초야만 치르고는 도망쳐나와 자야의 품으로 돌아오길 3번씩이나 했다.

백석은 부모님을 생각하며 장남인 자신과 봉건적 사고 사이에서 괴로워하면서도
자야에 대한 사랑은 변함이 없어
자야에게 아무도 모르는
만주로 도망가자고 설득했지만,

백석의 앞길을 막을까
두려워한 자야는 이를 거절하였다.

세월은 흘러 1939년 백석은 부모님의 낙향종용을 뿌리친 채 사랑하는 자야를 두고

시 백편을 써오겠다며 만주로 떠났는데 이것이 자야와 영원한
이별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드디어 해방을 맞아 백석은 이것저것을 정리한 후
한걸음에 달려왔지만,

휴전선이 가로막혀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으며 두 사람은
영원한 이별을 맞게 되었다.

그뒤 백석은 북한대학에서 국문학을 강의하고 지냈으며,

자야는 남한에서 성북동의
청암장이라는 한식당을 사들여
이를 요정으로 꾸미고,

그동안 갈고 닦은 재주를 마음껏 뽐내며 열심히 노력한 끝에 서울 장안에서 삼청각, 청운각과 함께 3대요정인 “대원각”을 만들었다.

이 대원각이 훗날 1000억원대의
부를 창출하게 되었는데
그러면서도 자야는 평생동안 밤낮으로 백석을 그리워하며,
백석의 생일인 7월1일이 되면

하루동안 일체의 음식을 먹지않고 지냈다.
노년의 자야는 백석의 시를 조용히 읽는 것이 생의 가장 큰 기쁨이었으며,

“백석의 시는 자신에게 있어 쓸쓸한 적막(寂寞)을
시들지 않게하는 맑고 신선한 원천수였다“고 하였다.

자야 김영한(金英韓) 1916~1999)은
법명(法名)이 길 상화
(吉祥華)인데,

시인 白石(본명 : 백기행1912 ~1995)보다 4년 후에 태어나

백석이 죽은 지 4년 후에 죽었으니 두 사람의 출생과 사망을 보면 참으로
기이한 운명인 것만 같다.

그럼, 여기에서 백석이 자야를 위해 지은 시를 한번 감상해 보기로 하자.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燒酒)를 마신다
소주(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멧새)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오막살이)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팔순을 바라보는 그녀가 오랜 기다림의 이야기를

<내 사랑 백석>이라는 책으로 출간한 무렵(1995년 1월)

백석은 북녘 하늘아래 어느 초라한 산골마을에서 83세를 일기로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뒤 1998년 백석이 월북작가라는 굴레로부터
해금조치가 된 후(그래서 우리는 학교에서 그에 대해 배운 적이 없음)

그녀는 1997년 현금 2억원을
창작과 비평사에 출연하여 "백석문학상"을 제정하여

시집을 대상으로 1999년부터 시상했는데 상금은 천만원으로 지금도 매년 백석 문학상을 수여하고 있다. 그러던 어느날 자야는 법정(法頂)스님의

“무소유” 를 읽고 크게 감명을 받아 당시 싯가

천억원대의 대원각을 시주할 테니 사찰로 만들어 달라고 법정스님에게 부탁을 했다.

그러나 법정스님은 너무 큰 재산에 놀라고,
또 기생들의 요정이라 줄곧 사양하다가

1995년 마침내 이를 받아들여 조계종에 등록하고,

1997년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로
이름을 지어 같은 해 12월14일 창건법회를 열었다.

길상사 창건법회날 자야 김영한 보살은 법정스님으로부터 염주하나와
길상화(吉祥華)라는 법명을 받았다.
그날 그는 “저는 죄 많은 여자입니다.

저는 불교를 잘 모릅니다만,
저기 보이는 저 팔각정은 기생들이 옷을 갈아입는 곳이었습니다.
저의 소원은 저곳에서 맑고 장엄한 범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길상화 김영한 보살은 1999년 11월 14일 목욕재계 후
본인이 기부한 길상사에 와서 참배하고 길상사 내에
있는 길상헌에서 백석을 그리워하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깨달음에 이르는 길은
오직 두 가지가 있다고 하는데,
하나는 자기자신을 속속들이 지켜보면서 삶을 거듭거듭 개선하고 심화시켜 가는 명상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이웃에 대한
사랑과 실천을 행하는 것이라 한다.

하나는 지혜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자비의 길인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평생동안
가슴속에 묻어두고 사는 사랑이 있다.

간혹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애틋한 정인(情人)일 수도 있으니 그것은 일생을 두고 아련한 아픔이 될 것이다.

물론 이런 아픔은 어떤 면에서
내 안의 행복'이라 말할 수도 있다.
그래서 옛말에 “추억이 많은 사람은 가난하지 않다”  고 했던가?

롯데그룹 신격호 회장은 어린시절에 읽었던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에서 유부녀 “롯데”를 잊지 않고
있다가 회사창업 시 기업이름으로 썼으며,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은
어릴 적 첫사랑을 잊지 못하고

소떼를 몰고 3•8선을 넘어 찾아 갔지만 끝내 만나지 못한 애달픈 사연도 있다.
우리 근 현대사에서 수많은 여인들의 지고지순한 사랑 이야기는 많지만 기생 진향의 곧은 절개는

현대에 사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주고 있다.
첫사랑을 죽을 때까지 지켜낸 여인그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여인 진향(眞香) 김영한(金英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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